역사적인물

1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

  • 한글명 : 퇴계 이황
  • 한자명 : 李滉
  • 호 : 퇴계(退溪)
  • 시호 : 문순공(文純公)
  • 출생지 : 예안
  • 본관 : 진성
  • 생몰년도 : 1501~1570
퇴계 이황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비로,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공적인 도리와 개인의 이익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부조리의 사회였기 때문에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구별을 뚜렷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일은 정치현실에서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도(道)를 전해주는 것이었다.그러나 은둔하고자 했던 그에게 끊임없이 관직이 권해졌고, 관직에 올랐다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결국 영원한 은둔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에서 벗어난 외직을 지망하였다. 그 후로도 번번히 관직을 사양하였고 69세가 되자 결국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관직과 낙향을 번갈아 하던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원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2자연을 노래한 풍류시인농암 이현보

  • 한글명 : 농암 이현보
  • 한자명 : 李賢輔
  • 호 : 농암(聾巖)·설빈옹(雪빈翁)
  • 시호 : 효절(孝節)공
  • 출생지 : 예안
  • 본관 : 영천
  • 나이 : 88
  • 생몰년도 : 1467~1555
농암 이현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로 본관은 영천이며 자는 비중, 호는 농암, 설빈옹으로 참찬 흠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사, 예문관봉교를 거쳐, 1504년 38세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후 중종반정으로 지평 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 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 선생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황준량 선생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 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농암가>,<생일가>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문집>>이 전해지며 시호는 효절이다.

3육사 이원록

  • 한글명 : 육사 이원록
  • 한자명 : 李源祿
  • 호 : 육사(陸史)
  • 출생지 : 안동
  • 본관 : 진성
  • 나이 : 40
  • 생몰년도 : 1904~1944
1904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아버지 이가호(李家鎬)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7세 때 할아버지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세에 도산 공립보통학교 1회로 졸업하였다. 17세에 영천의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였고,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세에 백학학원에서 교편생활을 9개월 동안 하였으며 20세에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21세에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고, 1926년 베이징 광뚱성 중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0년 26세에 아들 동윤이 태어나지만 2년 후 사망한다. 37세에 딸 옥비가 태어났으며 그 해 부친상을 당한다. 23세에 중산대학에서 전학기를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하여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25세 5월에 석방되어 중외일보 기자생활을 하였다. 1931년 1월 27세 때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되어 3월에 석방되었고, 만주에 머물다가 귀국하여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에 근무하였다. 1932년 28세에 베이징, 텐진 등에 머물다가 10월에 난징 근교 탕산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였다. 1933년 29세에 졸업하여 상해에서 노신(魯迅)을 만났다. 7월에 서울로 잠입하였으나 1934년 30세 3월에 군사간부학교 출신임이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가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7월에 맏형 소상에 참여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가 가을에 피검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에 의하여 시신이 거두어져 장례를 치루었다. 이원창에게 유골이 인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가 1960년 고향에 다시 안장하였다.
26세에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934년 30세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을 게재하였고,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시사평론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인보, 신석초 등과 함께 정약용 99주기 기념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하였으며 신조선 편집에 참여하여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33세경부터 시사중심에서 문학중심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35세에 “청포도”를 발표하였고, 36세에 “절정” 등을 발표하였다. 1943년 39세에 한글사용을 규제받자 한시(漢詩)만 발표한다. 1946년 육사 서거 후 유고작품 등 20여 편의 작품을 모은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하였다. 1956년 범조사에서 ”편복“과 수필 ”산사기(山寺記)“를 추가한 『육사시집』을 다시 간행하다.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광야“가 전면에 새겨진 ”육사시비“가 낙동강 가에 세웠졌다.

4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 )

조목(趙穆)의 자는 사경, 호는 월천. 동고, 본관은 횡성이다 조선시대 갑신년(중종 19년)에 태어나셨고 이퇴계 선생의 수제자로 5세에 대학을 읽고 12세에 사서삼경을 읽었으며, 애학하셨다. 명종 7년(1552)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 갔셨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렇다. 임진왜란때에는 의병을 모집 동생과 두아들로 더불어 곽재우와 합세하여 국난극복에 앞장셨던 분이다. 호인 월천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지어주셨으며, 위폐는 도산서원 이퇴계 선생 위폐옆 후향위 하였다.

5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 1520-1588)

  • 본관 : 광산
  • 자 : 중온
  • 호 : 유일재
이황의 문인으로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도산 근처에 살며 서사를 지어 후진을 교육하였다.김언기는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 풍산현 구담에서 태어났다. 김언기는 중년에 풍산의 구담에서 이계로 이동하였다가 만년에는 도산과 붉허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와룡면 가야에다 터를 마련하고, 인근의 오천에 사는 김부필 등 퇴계의 문도들과 매월 초하루면 산사에 모여 논도강학을 하였다고 한다,
1561년(42세)에 가야서당을 창건한 그는 여기에 유일재라 편액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생도가 너무 많이 모여들어 서당에 능히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6조선의 과학자불곡  이천

이천은 조선초기의 무신이자 과학자이다. 자(字)는 자현(子見)이며, 호는 백곡(柏谷) 또는 불곡(佛谷)이며, 익양(翼襄)을 시호로 받았다. 이천은 1376년(고려 우왕2년) 무신집안 출신인 예안이씨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송(李摩)과 어머니 곡성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천의 어머니는 고려말의 권문세력가, 염흥방의 누이동생이다. 그러나 염흥방이 최영, 이성계 일파에게 제거되면서 아버지 이송을 포함하여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이천과 그의 동생 이온은 다행히 한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천은 유년시절부터 무술이 뛰어나 1393년(태조2년) 18세의 나이로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1402년 무과초시에 급제했으며 1410년에는 무과중시(武科重試)에 합격하였다. 세종 원년인 1419년 왜구들이 충청도 앞 바다로 침입했을 때 우군첨종제(右軍僉摠制)로 임명되었다가 곧 우군부절제사가 되어 이종무가 이끄는 대마도정벌에 참가했다. 이천은 우군을 거느린 이지실을 보좌했는데 이때의 공으로 좌군 동지총제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종2품 무관급인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며 세종 2년(1420)에는 현재 과학기술부의 차관격인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임명된다.
이천의 과학적인 재질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였다. 이천은 군선의 물에 잠기는 부분이 빨리 썩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갑조법(甲造法,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고 군함의 선체는 크고 속도가 빨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제조된 군선이 왜구의 토벌에 크게 기여하자 그의 과학적인 재질을 인정한 세종은 야심에 찬 국책프로젝트 중에 하나인 금속활자를 만들도록 전격적으로 공조참판에 임명한 것이다.
이천은 공조참판으로 임직하면서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드는 일에 힘썼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 더 아름다운 자체(字體)를 만들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년(세종 16)에 갑인자(甲寅字)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운관에서 정초(鄭招), 장영실(蔣英實), 김빈(金聆)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1437년에 대간의(大簡儀), 소간의,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규표(圭表)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고도 불리는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野人: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구의 토벌과 북쪽 오랑캐의 정벌, 인쇄술의 향상과 도량형의 표준화, 천문의기 제작 등 무인과 과학자로써 화려한 생을 펼쳤던 이천은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한 조선초기의 대표적 과학자요 기술자로 볼 수 있다. '기술자 장군'이었던 그를 기념하기 위해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는 1977년 이천의 시호를 따라 익양관(翼襄館)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을 이천호로 명명했다. 

7조선시대 요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

  • 한글명 : 탁청정 김유
  • 한자명 : 金綏
  • 호 : 탁청정(濯淸亭)
  • 본관 : 광산(光山)
  • 나이 : 64
  • 생년 : 1491
  • 몰년 : 1555
김유(1491~1555)는 조선시대 식생활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요리서인『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이다.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며, 1491년(성종 22) 광산김씨 예안파의 파조(派祖)인 김효로(金孝廬)와 그의 부인 양성이씨(陽城李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인 순천김씨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주로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에 거주하며 집안을 돌보았다. 형인 김연(金緣)이 15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강원도 감찰사 등의 관직생활로 집을 자주 떠나 있어 어머니를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김유는 고모가 남긴 유산 덕택으로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꾸리며 풍류를 즐기고, 원근의 사람을 모아 인심을 베풀었다.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군자리(http://www.gunjari.net)에 있는 탁청정 종택과 정자는 1541년 김유가 건립한 건물로 당시 그의 살림살이를 잘 엿볼 수 있다.
김유는 넉넉한 살림에 성품이 호협하였고 빈객을 좋아해서 많은 나그네를 맞이하였으나 사람이 선하지 않으면 물리쳐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요리서를 저술하면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 이름한 것에서도 우리는 그의 풍류관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수운(需雲)’이라는 용어는 중국의 고전 『역경(易經)』에 등장하는 용어로 “구름 위 하늘에서 음식과 주연으로서 군자를 대접한다. [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즉 “수운잡방”은 풍류를 아는 군자에게 걸맞은 요리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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