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와룡농협


예안면

예안면Yean-myeon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 예안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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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살아 숨쉬는 마을, 예안

예안면은 안동시에서 3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지의 면으로서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와룡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은 임동면과, 동은 영양군과 접하고 있습니다. 면의 중앙을 낙동강 지류인 통계천이 흐르며 남부는 구계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산악으로 형성된 농촌지역으로 주로 고추, 사과, 담배, 참깨 등이 재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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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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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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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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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깨꽃

연혁

삼국시대 매곡현(買谷縣), 통일신라시대 선곡현(善谷縣), 고려시대 길주(吉州) 예안현(禮安縣), 조선시대 예안현(禮安縣)에서 예안군(禮安郡)으로 칭함.

  • 1914.예안군 폐지, 안동군에 속함.
  • 1974. 07. 01 월곡면 7개리, 예안면 9개리 합병 : 예안면

마을 현황

  • 면적 : 163.8km²
  • 가구 및 인구 : 1,062가구/1,879명
  • 행정구역 : 법정리 16개 , 행정리 20개 , 반 70개 , 자연부락 92개
  • 기관단체 : 4개(학교1, 파출소, 우체국, 보건지소)
  • 문화재 : 7점(유형문화재 3, 민속자료2, 문화재자료2)
  • 교육기관 : 초등학교 1

계곡리(桂谷里)

압시골, 찰앞시골, 웃게일, 장성백이 등의 마을로 구성

계곡리는 안동군 임북면에 속하였으며 계일, 또는 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마곡, 전시곡, 장성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를 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월곡면이 폐지됨으로서 예안면에 속하였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계곡리는 압시골, 찰앞시골, 웃게일, 장성백이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는 30여호이다.

귀단리(歸團里)

고통, 와운데, 지촌, 가래실, 인겔, 금곡, 한자골, 새마을 등의 마을로 구성  

이 마을은 구한말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구다니 또는 구단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갈동을 병합하여 귀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귀단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가구수는 60여호를 헤아린다. 귀단 1리는 고통, 와운데, 지촌으로 이루어지며, 2리는 가래실, 인겔, 금곡, 한자골, 새마을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구룡리(九龍里)

동다리, 원구룡, 소월, 양옥, 원심이, 한바우 마을로 구성

옛날 안동군 임북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구렁이 있으므로 구렁, 또는 구룡방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달리, 양옥동을 병합하여 구룡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구룡리는 동다리, 원구룡, 소월, 양옥, 원심이, 한바우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이다.

기사리

경치가 좋다

아마리 아마리골 아휴리(阿休里) 조선 숙종 15년 창녕인(昌寧人) 조규승(曺圭承)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며, 연대 미상이나 채정승이라는 분이 벼슬을 하여 이 곳을 지나다가 경치가 좋아 쉬어갔다 하여 아휴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아마리로 부른다. 선암골 선암동(仙岩洞) 영천 이씨인 이공(李公)이 전사했는데 그가 탓던 말과 말방울이 이 곳에 돌아 왔다. 이에 선암당(仙岩堂)을 지어 그의 영혼을 모셨으므로 동명을 선암골로 부르게 되었다.

도목리(道木里)

산천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고,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

수몰전 이 마을은 원래 영양남씨(英陽南氏)와 흥해배씨(興海裵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조선조에 학행으로 군위훈도(軍威訓導)에 천거된 영양인(英陽人) 남첨 선생이 이곳 산수의 아름다움을 취택(取擇)하여 와룡면 주촌(周村)에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산천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고,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도목(桃睦) 또는 도목촌(桃睦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점장이가 와서 마을 주위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도목촌(道木村)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또 도목(道睦)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첨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려 후손들이 8칸의 정사(精舍)를 지은 뒤 편액을 '도목정사(道睦精舍)'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도(道)로서 일족을 돈목(敦睦)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영가지의 부북(府北) 임하현(臨河縣)에 실린 도목촌 부분을 보면 '도목촌은 현(縣)의 북쪽 35리에 있으며 본부(本府)에서 3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인데, 이 곳에는 100여자 되는 석벽(石壁)이 있어 이를 '검암(儉巖)'이라 불렀으며, 그 바위 위가 평평한데 대(臺)를 지어 이름하기를 '임연(臨淵)'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찰사 배삼익(裵三益) 공이 여기에다 대를 짓고서 임연이라 자호하였는데 관찰사의 선군(先君) 증참판(增參判) 배천석(裵天錫, 1523∼1573) 공이 처음 와서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배천석 공이 서후면 금계(金溪)로부터 도목촌으로 이거한 이래 공의 아들인 임연재(臨淵齋)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고 벼슬이 황해관찰사에 이르렀으므로 그 친우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선생이 이 마을의 이름을 '도맥(道脈)'으로 부르기를 권했으나, 공은 과분하다고 하여 '도목(桃木)'으로 정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목리는 행정구역상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에 속해있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리와 동후면의 구미동, 신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목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도목촌의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도목리의 가구수는 3개 반에 약 30호로 가래골, 구미, 오미골 등의 마을에 나누어져 있다.

도촌리(道村里)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다. 

도촌리는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는데 그 유래는 옛날에 물편 사람들이 영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영양을 거처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이 마을을 지나 예안까지 내왕하였는데, 장갈령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길을 길골이라 하였으며, 한창 때는 3, 40명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통마, 톳골, 오미골, 수락골, 고사리골, 평지마, 사래실을 병합하여 도촌동(리)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피박 혹은 피박골로도 부른다. 피박골로 부르는 이유는 사래실 앞산에 고지박을 닮은 명당이 있는데 그곳을 껍박이라 하며 한자로 쓰면 피박(皮朴)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마을은 사례실, 평지마, 지통마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40호이다.

동천리(東川里)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川)

이 마을은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학리, 부모리, 장갈리를 병합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川)의 뜻을 따서 동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으며 가구수는 28호이다

미질리(美質里)

9가구로 안동시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

미질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미지리, 또는 미질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계, 벌탄, 벽지곡, 동파를 병합하여 미질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월곡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국민학교, 고등공민학교, 시장 등이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미질리에 속한 마을은 현재 움터 마을 하나 만 있으며, 가구 수는 9가구로 와룡면 절강리와 더불어 안동시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가 살아간다.

부포리(浮浦里)

부라원(浮羅院)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하였다. 

이 마을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공영제도(驛院公營制度)에 의하여 예안현(禮安縣)에 속했던 부라원(浮羅院)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동하동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천동과 의동면의 분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포동(리)이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부포에 오래 전부터 살았던 성씨로는 호군(護軍)으로 있던 안동권씨(安東權氏) 경력(經歷) 권간(權簡)의 상세(上世)로부터 살았다고 하며, 그 후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조금 뒤에는 진성이씨(眞城李氏)들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수몰전 부포리는 넓은 들이 기름진 100여호의 큰 동리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비교적 생계가 넉넉해서인지 예부터 수(壽)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부를 만큼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부포리에는 역동, 가늠골, 호사골, 햇골 등의 마을이 남아 있으며 가구수는 3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적은 수에 속한다.

삼계리(三溪里)

성황리 앞에 세 내가 합하여 흘러가므로 삼계동이라 한다.

예안군 동상면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늣골, 성황리, 오도락, 원음, 고감을 병합하여, 성황리 앞에 세 내가 합하여 흘러가므로 그 뜻을 따서 삼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삼계리는 현재 수능골, 성황, 오평, 원음, 고감, 이들리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가구이다.

신남리(新南里)

예안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봉화군과 닿아 있다.

예안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봉화군과 닿아 있다.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죽, 정자곡, 구통, 두곡, 산양평, 점곡과 봉화군 재산면의 남면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성(山城) 남쪽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신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신남리는 현재 정자골, 선양바들, 자운, 높은데, 구티미, 점곡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70여호를 헤아린다.

인계리(仁溪里)

동계천(東溪川)의 뜻을 따서 인계리라 하였다.

예안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동군 동상면에 속해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구리, 도동리, 전두리, 건천리, 송곡을 병합하여 동계천(東溪川)의 뜻을 따서 인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근래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인계리는 현재 청구, 독실, 상전두, 하전두, 건천, 솔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이다.

정산리(鼎山里)

예안면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산다.

정산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정정리(上鼎井里), 하정정리(下鼎井里), 등산리(登山里), 계곡리(桂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정(鼎井)과 등산(登山)의 이름을 따서 정산동(리)가 되었고, 1934년에 다시 행정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정산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전체 가구수는 19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산다. 정산 1리는 시장, 등재, 상활지, 하활지, 마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산 2리는 샛터, 오리실, 중마, 솥우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진리(舟津里)

낙동강 가의 나루터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천리와 임북면의 박곡리와 예안군 읍내면의 천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주진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37년 안동댐의 시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70여호이다. 주진 1리에 속한 마을로는 배나들이 있으며, 주진 2리에는 삼산, 오른데, 노천 등의 마을이 있다

천전리(川前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川前]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천전동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읍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上川), 중천(中川), 하천(下川)을 병합하여 천전리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시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천천리는 미질리와 더불어 예안면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가 살아가는 동네로 상천, 중천, 하천 마을에 약 10가구가 살아간다.

태곡리(台谷里)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으므로 탯골,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으므로 이름을 탯골, 또는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 서문에서 '...송(宋)나라 대중(大中), 천성(天聖) 연간인 현종대(顯宗代)에는 길주(吉州; 옛 안동)에 속했는데 신우(辛禑:고려 우왕)의 태(胎)를 현 동쪽에다 묻었다하여 다시 군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주로 승격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현 동쪽이 지금의 태곡이며 그 뒷산에 태를 묻었음으로 그 산을 지금도 태봉이라고 한다. 태곡리는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촌, 곡촌, 퇴산, 남산, 덕현과 동상면 인제동 일부를 병합하여 태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곡리는 덧재, 물미, 골마, 밭마, 남산, 탯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80가구이다.

동방의 주자 역동 우탁

/역동 선생(1262~1342)
향공진사 휘 천규의 아들로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태어나셨다.
선생의 휘는 탁, 자는 천장 또는 탁부이며, 호는 단암 또는 백운당이며, 시호는 문희이다.세칭 역동(易東)이라고도 한다.

연보
년도 내용
1263년(1세)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출생.
1278년(17세) 17세에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됨.
1290년(29세) 정가신(鄭可臣)이 주관한 과거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함.
1291년(30세) 영해사록(寧海司錄: 지금의 경북 영덕의 지방관)으로 임명됨.
1308년(47세)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됨.
충선왕이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간(犯奸)하는 패륜을 자행하자, 이튿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림.
년도미상 진현관(進賢館) 직제학(直提學)에 임명
년도미상 성균관 좨주(종3품)로 승진
1342년(81세) 2월 7일 81세로 생을 마쳤다.
- 회헌 안향(1243-1306)의 문하에서 수학

역동서원을 창건하신 퇴계선생(1501~1570)께서는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에 "역동선생의 충의대절은 이미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움직일만하고 경학의 밝음이나 진퇴의 정당함은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바 있으니 후학의 사범이 되어 백세의 묘향을 받아야 할 분이시다."라고 쓰셨다.

선생께서는 만년에 예안에서 서남쪽 오리 지점, 행정구역으로 안동군 예안면 선양리에 은거하셨다.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선생이 도학, 충의, 절조의 덕을 실천하신 곳이라 하여 지삼의라 불러 후세인의 사표가 됨을 기리고 있다. 선생의 대표적 배향서원으로는 역동서원(안동대학교내에 위치)과 구계서원(영남대학교내에 위치)이 있다.

고려 말에 우탁(禹倬)이 지은 시조

탄로가(嘆老歌)

고려 말에 우탁 (禹倬)이 지은 시조. 歎老歌(탄로가)로 표기하기도 한다. 모두 3수로 늙음을 한탄한 주제를 담고 있다. 작자가 충선왕의 패륜을 극간하다가 진노를 입어 예안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며, 새로 들어온 주자학을 연구하다 보니 어느덧 백발이 되어 인생의 늙음을 안타까워하여 읊은 것이다.

< 탄로가(嘆老歌) >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白髮)막대로 치려터니
배발에 저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하였고, 춘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의 힘을 빌려 인간의 삶을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봄바람이 눈덮인 산을 녹이듯 자연의 위대한 힘을 빌려 인간에게 찾아오는 백발을 없애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았다.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젊어 보려터니"로 시작되는 작품은 늙지 않고 젊어보려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찾아드는 백발은 어쩌지 못하고 젊은 여인을 탐하는 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이따금 꽃밭을 지날 제면 죄지은 듯 하여라."라고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죄책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늙음을 가져오는 자연의 질서에 맞서보려는 안간힘과 죄책감이 인간미를 더해주고 있다.

/ 농암신도비 1566년에 대제학 홍섬(洪暹)의 비문과 송인(宋寅)의 글씨로 세웠다.
분강서원과 애일당 사이에 위치하였으나 안동댐 수몰로 예안면 신남리로 이건 하였다.

예안면의 특산물바람과 햇살을 머금은 예안면의 건강한 농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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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질이 부드럽고 달고 맛있습니다.
  • 출하시기 : 9월 하순~
  • 산지형 지형에서 생산
  • 맑은 바람과 높은 일조량으로 즙이 많고 당도가 높습니다.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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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깔이 곱고 당도가 높습니다.
  • 출하시기 : 9월 하순~
  • 도산태자사과작목반
  • 주진사과작목반
  • 예안사과작목반
  • 등 11개 작목반
  • 맑은 바람, 풍부한 일조량으로 당도가 높습니다.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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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은 바람을 맞아 빛깔이 곱고 강렬한 볕을 받아 맛이 매콤합니다.
  • 출하시기 : 8월 초순~
  • 지내고추작목반
  • 와룡친환경농업작목반
  • 와룡비가림고추작목반
  • 등 11개 작목반
  • 껍질이 두꺼워 가루가 많이 납니다.
안동와룡농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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